미국의 유일한 황제 노턴1세
사회

미국의 유일한 황제 노턴1세

by 림프사랑 2023. 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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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칭 황제라 칭했던 노턴1세

 

1859년 샌프란시스코 불리틴 신문사에 초라한 행색의 한 남자가 찾아옵니다.

그는 자신을 미국의 황제 <노턴 1세>라고 주장하며 자신이 작성한 취임 선언문을 편집장에게 건넵니다.

당시에 황당하기만 했던 편집장은 신문 판매 부수를 늘리려는 생각에 황제 취임 소식과 성명을 신문 1면에 

실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시민들은 폭발적인 반응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당시 미국에서 노예문제를 두고 남과 북이 

서로 대립하고 정당 파벌간의 싸움이 잦았던 상황에서 <노턴 1세>가 나타나 정치인들의 부정부패를 질타하고,

<제임스 뷰캐넌>의 대통령직 박탈과 의회 해산등을 명령하고, 황제인 본인이 친히 정사를 돌본다는 내용을

발표합니다. 그리고 당시 부통령이던 <존 C. 브레킨리지>를 신임 버지니아 주지사로 임명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워싱턴 D.C의 행정부는 이에 대해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고, 노턴은 '육군참모총장'에게 "필요한 병력으로

의사당에 진격하여 국회를 해산시키라"고 명령합니다. 노턴이 진격 명령을 내린 사람은 실제 참모총장이 아니라

약 15년 전 육군 최고 사령관이던 <윈필드 스콧> 장군이었는데, 이 시기에 그는 이미 74살의 노인이였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당시엔 <과대망상증> 노인의 해프닝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노턴 1세 본인 역시 과대망상을 제외하면

어디까지나 '미국의 안위를 걱정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행보'를 보였고, 스스로가 '황제'가 되면서 얻는 인기와

명예를 범죄에 사용하지 않던 그는 미국인들의 지지를 받기엔 충분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가진 낡은 육군 대령 군복 한 벌만을 입었고, 특별한 직업은 없이 낡은 하숙집에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시민들의 초청에 응한 강연에서 보여준 그는 정말 황제다운 면모를 아낌없이 보여준 사람이었습니다.

실제 그의 생활과 가치관에서 엿보였던 행보는 이러했다고 합니다.

 

● 모든 사람들이 믿을 수 있는 만국 종교를 제창하였고,

19세기에 벌써 비행기의 연구를 위해 기금을 조성했으며,

국제연맹, 즉 UN같은 세계정부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현수교 공법으로 샌프란시스코 만에 다리를 지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모든 인종을 공평하게 대우하고, 모든 종교의 집회에 출석합니다.

 

그의 본명은 <조슈아 에이브러햄 노턴>으로 대통령제의 정치제도를 가진 미국의 최초이자 마지막황제를 자처한

인물로 영국 런던 출신으로 어릴때 모두 남아공 케이프타운으로 이주했습니다. 일찍 상업에 종사해서 돈을 많이

벌었으며 아버지 사망후 가산을 처분해서 4만 달러를 가지고 브라질로 갔다가 1849년 '골드 러시'가 터진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게 됩니다.

 

노턴은 부동산에 투자하거나 여러개의 잡화점을 운영하기도 합니다. 

당시 캘리포니아 지역에서는 청나라로부터 쌀 수입을 하고 있었는데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고 기근이 들어

쌀 수출 금지령이 내려지자 미국에서 4센트 정도였던 쌀값이 36센트까지 폭등하게 됩니다.

 

쌀값은 계속 올라 1파운드당 50센트까지 폭등하자 노턴은 가격이 더 오르기를 기다렸지만, 이후 페루산 쌀이

들어오면서 쌀값은 폭락하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3센트까지 하락하고 맙니다. 그후 파산지경까지 이르게되고

몇년 동안 샌프란시스코를 떠나는데 그 동안은 알려진 바가 없다고 합니다.

 

노턴 1세는 자신이 가진 낡은 육군 대령 군복 한 벌만을 입었고, 특별한 직업없이 초라한 하숙집에 살면서,

시민들의 고민을 들어주었는데 자신의 일처럼 여기면서 언제나 약자의 편에 서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시민들의 문제를 자신의 일처럼 여기는 인간적인 모습에 시민들은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며 그를 황제로

추앙하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샌프란시스코에서 반아시아인 폭동이 발발하자, 홀로 폭도들을 가로막고 그들이 해산할 때까지

주기도문을 외웠다고 합니다. 남북전쟁이 터졌을 때는 전쟁을 그만두라면서 당시 "미국 대통령 링컨과 남부연맹

제퍼슨 데이비스를 소환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그 두 사람은 황제의 소환 명령에 응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노턴은 황제의 품위 유지를 위해 돈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자신의 이름을 새긴 화폐와 국채를 발행하고, 이 화폐는

샌프란시스코 전역에서 통용되었습니다. 그는 국채를 발행하면서 이 국채를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는 큰 돈을 벌게

될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50센트 국채에는 매년 7%의 이자가 붙을 것이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는 황제를 위한 세금을 부과하기도 했는데 은행은 매주 3달러, 상점은 주당 20센트였습니다.

이 세금은 강제 징수가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시민들이 이를 착실히 납부했다고 합니다.

화폐 수집가들 사이에서는 꽤 인기있는 아이템으로 2012년에 50센트 국채는 18,400달러에 팔렸다고 합니다.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식당에서는 그에게 무료 식사를 제공하였고, 상점이나 식당에서는 그의 허락을 받아 입구에

기념패를 내걸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모든 극장들은 노턴1세의 전용 특별석을 마련해 두었다고 합니다.

 

모든 교통수단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으나 '센트럴퍼시픽' 열차회사에서 그의 무임승차를 거부하자 황제는

이 회사에 영업정지 명령을 선고하였고 열차회사는 종신 무료 탑승권을 바치면서 사죄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제복이 낡자 포고령을 내려 자신의 예복이 국가적인 수치라고 하였으며, 이에 시 위원회에서는 급히 황실

예복 비용을 마련해 그에게 최고급 맞춤옷을 지어 바쳤고 이에 노턴 1세는 흡족해 하며 친서와 함께 위원 전원에게

귀족 작위를 내렸다고 합니다.

 

1867년 평소 노턴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던 한 경찰이 그를 과대망상증 환자라며 경찰서에 구금했고, 이를 분노한

시민 수백명이 황제의 석방을 요구하며 폭동을 일으킵니다. 몇일동안 계속된 폭동에 시달린 경찰서는 물론

샌프란시스코의 모든 업무가 마비될 지경에 이르자 결국 경찰은 노턴 1세를 풀어주었고 경찰서장과 시의회가

그에게 용서를 구하는 일까지 벌어집니다.

 

이후 노턴 1세의 존재는 샌프란시스코를 넘어 미국 전역에 알려지고, 이런 유명세로 말미암아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노턴을 모델로 한 왕 캐릭터를《허클베리 핀의 모험》에 등장시키기도 합니다.

노턴은 영국 <빅토리아>여왕에게 청혼을 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이미 여왕의 배우자가 있는데 청혼에 응할리

만무 한 것이였습니다.

 

 

1880년 1월, 강연을 하러가던 노턴은 길거리에서 쓰러져 심장마비로 사망하였습니다.

그의 장례는 샌프란시스코 시의회장으로 치러졌고 그의 장미빛 목관은 샌프란시스코 사업가협회에서

마련하였습니다.

 

모든 상점들은 문을 닫아 조의를 표했으며, 1만명이 넘는 조문객의 발길이 이어졌는데 부자부터 거지까지

신분과 빈부격차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장례행렬의 길이는 3km가 넘었다고 전해집니다.

샌프란시스코 외곽에 있는 그의 묘지에서는 매년 2월 14일 '노턴 1세의 날' 행사가 열린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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