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대히트를 기록한 대중가요 <사의찬미>를 소개합니다
1926년 8월 일제강점기에 발표했으니 올해로는 96년째 되는 해가 되네요.
<요시프 이바노비치>의<다뉴브강의 잔물결>왈츠곡을 윤심덕이 가사를 직접 써서
가창곡으로 편곡한 것으로 한국어 음반으로서는 처음으로 일본에서 발매되었다고 하네요.
한국 대중가요의 효시는 <희망가>를 번안한<이 풍진 세상>으로,
<사의찬미>는 역사상 최초의 대히트를 기록한 대중가요로 알아야 합니다.
특히 죽음을 찬미하는 내용의 노래가사처럼, 윤심덕이 일본에서 귀국길에 오르면서
현해탄(대한해협)에서 연인 김우진과 함께 자결하면서 더욱 화제가 되었을 당시 나이는 29세였네요
<요시프 이바노비치>의<다뉴브강의 잔물결>
1880년대 군악대를 위한 왈츠곡으로, 애수를 띤 특유의 선율은 동유럽적인 분위기를 지니고 있죠.
이바노비치는 이 작품 하나로 음악사에 남게 되었고, 전세계에서 불려지는 유명한 곡이 되었습니다.
본래는 <왈츠>였는데 경쾌한 곡조를 느리게 연주하여, 처연하고 비극적인 느낌이 극대화 되었다고 합니다.
1897년 평양출신인 윤심덕님은 가난한 집안의 4남매중 둘째로 그녀의 어머니는
당시 미국인 여의사 <홀>부인이 운영하는 광혜원에서 간호조무사로 근무하면서
자연스럽게 서구적 사고방식을 가지게 됩니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지만 교육에 힘을 쏟았던 어머니 덕에
윤심덕님은 신학문을 배우며 성장합니다.
그렇게 진남포 보통학교와 평양 숭의여학교를 거쳐 당시 여학교로서는 최고의 학벌로 인식되던
경성여고보 사범과에 진학하게 됩니다.
<경기여고>의 전신이 <경성여고보>로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윤심덕님은 졸업후에는 당연히 서울(경성)이나 평양의 좋은 보통학교에 교사로로 부임될 줄 알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총독부의 학무국에서는 그녀를 강원도 원주로 발령 보냅니다.
학창 시절 내내 성적이 우수했던 윤선생님은 이러한 처분에 화가 났고 과감히 유학을 결심합니다.
평소 노래하는 것을 좋아했던 윤선생님은 어머니가 일하고 있던 광혜원의 <홀>부인이 주선한 기회를 얻어
총독부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에 가 <동경음악학교> 성악과에 입학합니다.
당시 유학생들 사이에서는 윤선생님과 함께 미술을 전공하기 위해 유학 와 있던
<나혜석>선생님이 선망의 대상이었다고 합니다.
훗날 연인 사이로 발전하게 되는 <김우진> 선생님을 비롯해 <홍난파, 마해송, 김기진> 등
젊은 인재들과 함께 극단을 꾸려나가면서 성악가로서 기질을 키웁니다.
<김우진>선생님은 장성 군수의 아들로 태어나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는데,
어릴 적부터 문학을 좋아해 글 쓰는것을 즐겼다고 합니다.
집안에서는 <구마모토> 농업학교로 유학을 보냈지만 몰래 <와세다대학> 영문과로 학교를 옮겨서는
극단을 꾸려 순회공연을 다닙니다.
서로의 예술적 재능을 알아보고 사랑을 키워나가기 시작한 두 사람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란 것을 알면서도 깊이 빠져들게 됩니다.
김우진 선생님은 이미 결혼해 자식까지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후 윤선생님은 귀국하면서 '조선 최초의 소프라노'라는 타이틀과 함께 엄청난 인기를 누리게 됩니다.
큰 키에 노래 실력도 있었던 그녀는 남심을 자극하며 올라가는 무대마다 만원을 이룹니다.
하지만 당시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연예계와는 사뭇 달랐다고 합니다.
치솟는 인기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 늘 궁핍했습니다.
그 와중에 동생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면서 경비를 마련해주기로 결심한 그녀는
전속 계약이 되어 있던 일본의 <닛또레코드>에서 500원을 받고 26곡을 녹음하자는 제의를 수락합니다.
1926년 7월 동생과 함께 녹음하러 일본으로 떠난 윤선생님은 예정에 없었던 '사의찬미'를
동생의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녹음합니다.
7월 26일에는 녹음을 마치고 받은 돈으로 동생을 <요코하마>항에서 미국으로 가는 배에 태워 보낸
행적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뒤 충격적인 뉴스가 전해집니다.
윤심덕과 김우진이 시모노세키를 떠나 부산항으로 오는 배 위에서
현해탄(대한해협)으로 몸을 던져 자결했다는 비극적인 소식이었지요.
두 사람의 사랑과 죽음에 대해서는 많은 루머와 추측들이 있었습니다.
타살이라든지, 자살을 위장해 자취를 감추고 어딘가에서 살고 있다든지 사람들의 의혹이 커져만 갔습니다.
어찌되었건 간에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특종을 홍보 수단으로 이용한 <닛또레코드>는 엄청난 수익을 올립니다.
음반은 물론이고 당시 집 한 채 가격이던 <유성기>가 품절될 정도였다고 하네요.
'사의찬미'라는 노래가 우리나라 음악사에 미친 영향은 실로 대단했다고 합니다.
사건이 있은 지 1년 뒤인 1927년에는 <콜롬비아레코드>가 국내에 지사를 설립했고,
이듬해에는 <빅터레코드>가 국내에 진출하게 되지요.
우리나라 대중가요 음반 산업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윤심덕선생님의 '사의찬미'를 녹음할 때 자신의 미래를 예견한 것인지
혹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야기가 숨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노래를 시작으로 우리 대중가요의 역사가 꽃을 피우게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두고 있습니다.
지금은 상상이 안가겠지만 그 시절, 그 당시의 일제강점기에는
자유스런 아무런 행동을 할 수 조차도 없던 시기라서,
너무 우울한 인생에 한 줄기의 빛조차 느끼지 못했던 <암울>자체의 시기였습니다.
29세의 젊은 나이에 아까운 인생을 바다에 던져버리는 안타까운 선택을 한 윤심덕!
김우진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더욱더 고통스러웠을 거라 생각합니다.
바다를 보며 현해탄(대한해엽)에서 느꼈을 마지막 고통!
"죽어서 다시 만나자"라는 눈물의 마지막 키스!
자유인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은, 안타까운 몸부림이었을까요
노래가사에서 절절히 느껴지는 고통이 언제나 암울하게 느껴집니다.
우울은 암울로 진행하고 암울은 죽음으로 거대해 진다는것을 잊지않기를 바라며~~
이상 윤심덕님의 '사의찬미'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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