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부가 첫 번째 박을 탔을 때 곱게 치장된 상자 하나가 나온다. 분명히 외제 상자다.
그것을 열어보니 모두 중국의 선인들이 먹었던 불로초. 불사약이 가득하다.
두번째 박을 타보니 비단이 쏟아져 나오는데...그 모두가 외제 옷감이다.
이어 갖가지 보패가 쏟아져 나오는데 천축(天竺)호박에 안남(安南)루비, 유구(琉球)산호에 여송(呂宋)의진주...
그 역시 외제들이다.
연지곤지 화장품도 외제요 사서삼경 백가제어...책들도 외제요.
박 속에서 걸어나온 비연이며 양귀비...첩까지도 외제다
물론 소설 속의 외제들이긴 하나 최고급품을 과장할 필요가 있을 때 굳이 외제들을 나열하는 뜻은~
옛날부터 우리 한국인들은 '외제=고급' 이라는 등식의 사고방식이 보편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외제밀수는 어제오늘의 문제만이 아닌 우리 역사와 더불어 유구한 민족의 고질병이었다.
청나라에 사신 따라가는 것을 연행한다 했는데 연행길에 많은 밀수를 해가지고와 치부한다 하여
'연행(燕行) 길 연행( 連幸)' 이라는 속담도 있었다.
한 번 연행길에 200여명이 수행하는데 한 사람당 세 바리씩 사갖고 오는 것은 묵인된 불법이 돼어 있었다 한다.
명종 때 꿋꿋했던 김덕곤이라는 어사는 이 금품들을 색출해서, 불태웠는데
그 쌓아놓은 무더기가 작은 산만 했다 하니 알아볼 만하다.
왜 우리 한국인이 불치의 외제병에 걸렸는가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다.
우리 한반도가 넓은 대륙의 동쪽 끝에 자루처럼 달려 있어 가지가지 각기 다른 문명이 동으로 흘러흘러
결국은 이 자루 속에 들어가 동화되길 수천 년 하다 보니~
색다른 문명의 소산인 외제에 대한 저항감이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외제면 항상 새롭고 좋다는 인식이 생겨났음직하다.
또한 가뭄과 전쟁의 끝바꿈으로 최소한의 의식주로 만족해야했고 검약과 질박(質朴)을 가치관으로 일관해온
우리 사회에서 화려한 외제가 억눌려온 욕구를 강력하게 자극하기 때문으로 볼 수도 있다.
서양사람들은 차림새나 세간들을 외제건 국산이건 또 비싸건 싸건 간에 자신의 개성이나 선호에 맞게 취한다.
한데 한국사람은 남들이 고급으로 여기는 척도에 따라 그것을 따라 한다는 것이다.
서양사람들에게 있어 치장이나 세간들은 자신의 연장인데
한국사람들은 자신이 치장이나 세간들의 연장이 된다.
그래서 아무리 국산이 외제보다 질이 좋더라도 외제를 더 선호하고 선택하는 콤플렉스가
한국병으로 정착하게 된것일 것이다.
정부에서는 외제 유명상표를 국내시장에서 무한 공개할 방침을 세운지 오래다.
외제상표 범람시대에 국산품에 외제상표를 붙여야 비싸게 팔리고, 또 비싸더라도 사는 이 모순의 당착을
언제까지 지속해야 하는가 한심스럽기만 한 외제병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