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울산 아지메입니다.
사실 저는 남들이 건망증에 시달릴 때도 꼼꼼하고 분명했던 사람이라 그런 증상도 없었고
남들이 건망증으로 업은 애를 없어진 줄 알고 찾으러 다녔다는 등,
혹은 전화기를 냉장고에 넣었다는 등,
차 위에 김치통을 매달고 달렸다는 둥,이런 얘기를 들을 때도 이해를 못했거든요.
'정말 와카겠노? 쯧쯧...' 이랬었는데 제 나이 마흔 대를 넘어서면서부터 건망증이 아니라
이상한 증상이 생기기 시작하더라구요.
그건 바로 분명히 말은 한국말이고 수십 년을 들어온 말인데도
그걸 제대로 못 알아듣고 엉뚱한 소리를 삥삥하게 됐다는 거지요.
그렇다고 영어나 잘하면 그래서 그런가보다 할 텐데,
아니 한국 떠나 살아본 적이 없는데 이런 증상이 왜 생기냐구요?
얼마 전에는 제가 피부과에 볼일이 있어 갔던 적이 있습니다.
병원에 도착해서 진료를 받고 나오려고 하는데 의사선생님이 저를 꼼꼼하게 보시더니 그러시더라구요
"아, 몇 가지 지켜주실 게 있는데 쪼매 복잡하니까 잘 들었다 기억 하이소."
"그게요, 첫째 약은 아침저녁으로 드시고요, 한 달에 꼭 한번 병원에 오시고 그라고 일주일 복용 후에는 삼주일 쉬었다가 다시 드셔야 합니데이. 아셨습니까?"
아, 순간 머리가 빙빙 돌면서 처음 몇 마디만 들리고 말더라구요.
그래도 자존심이 있지 우째 다시 모른다고 물어보겠습니까?
대강 알았다고 한 뒤 나가서 간호사 언니한테 물어보려고 했지요.
그런데 이런 저를 다시 한번 보시던 의사선생님이 그러시더라구요.
"그라마, 제가 뭐라고 했는지 함 말해 보이소?"
아! 이럴 수가 있나?
저 순간적으로 당황해서 얼버무리다가 이렇게 말하고 말았습니다.
"예 그게요. 약은 한 달에 한번 먹고예. 병원은 아침저녁으로 가구예. 그라고 삼주일 먹다가 일주일 쉬는 거 아닌교?"
그날 의사선생님 표정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한참을 천장 한번 쳐다보고 제 얼굴 한번 쳐다보고 그리고 한숨을 쉬시더니 갑자기 신경질적으로 이카데요.
"간호사! 여 메모지 갖고 와라."
"아지메요. 이 무좀은요, 약을 잘 맞춰가 먹어야 낫심니데이. 써준 대로 몇 번 읽고 꼭 지켜 주이소. 알았지예?"
아, 그리고 싸늘하게 '우야면 좋겠노!' 하는 표정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날 그것 뿐은 아니었습니다.
그날 처방전 받아들고 근처에 있는 약국 갔거든요.
한 참 기다리고 있는데 약사 아줌마가 약봉지 들고 나오시더니 대기석을 향해 그러시더라구요
"저기, 함평 구씨 있습니까?"
그래서 제가 다시 그랬지요 "하모요, 지가 함평 구씨 아인교? 함평 구씨."
그러자 마지못해 그 약사 아줌마가 약을 건네주시는데 그거 들고 문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웬 아저씨 목소리가 들리더라구요.
"아지메요, 와 넘의 약을 가져 가시는교? 그기 내 약이라요. 함평구."
제 이름은 구미숙이고 어디 구씨냐고 물어보시면 저는 함평 구씨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런데 어째 그 약국에 이름이 '함평구' 이런 분이 있는 거냐구요!
저는 진짜로 잘못 없습니다.
약사 아줌마가 함평 구씨냐고 물어봐서 제가 함평 구씨 맞다고 말해준 것 뿐인데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예?
그날 약사 아줌마랑 함평구 씨가 우찌나 째려보는지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그날 남편하고 무지하게 싸웠지요. 뭐 땜에 싸웠냐고 물어보시면 우리네 싸우는게
뭐 돈 문제 빼놓으면 뭐가 있겠습니까?
"돈 많이 벌어 온나?"
"니는 내가 돈으로 보이나?"
뭐 이러면서 대판 쌈이 났는데 다음날 새벽에 일어났더니 식탁위에 남편 글씨로 적힌 쪽지가 하나 있더라구요.
"내 은행 털러 간다. 곧 올꺼니까네 준비해 놔라"
아이고, 어젯밤 마스크랑 플래시를 찾더니만 그라믄 진짜로 이 남자가 싸움 끝에 은행을 털러 갔나?
참말로 순간 어디서 많이 봤던 텔레비젼 장면이 생각나더만요.
'40대 가장 생활고에 못 이겨 은행 털다 덜미!'
그리고 점퍼 뒤집어쓴 남자가 그러겠지요.
'흑흑 아내가 돈 벌어오라꼬 구박을 해서 저도 모르게 마누라를 기뿌게 해줄라꼬 털었심더.'
그리고 며칠 전 새마을금고 털린 사건이 터졌을 때 남편이 그랬거든요.
"점마, 아이고, 털라믄 제대로 털어야제. 저러케밖에 몬하나? 참말로. 내가 해도 낫겠데이."
세상에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쳤지요.
휴대폰은 꺼져 있더만요. 다시 또 머릿속이 뱅뱅 돌더만요.
남편 옥바라지는 어떻게 할것인가? 사식도 넣어줘야 한다는데 사식은 또 우예 넣어주고,
얘들은 남편 없이 어떻게 키울 것인가?
이런 복잡한 심정으로 냉장고 문을 열고 남편이 먹다 남긴 소주를 살짝 한 모금 마시고 짐을 쌌습니다.
왜냐구요? 남편이 준비하라고 했잖아요. 일단 어쩌겠습니까?
비록 남편이 은행을 털었지만 그래도 우리를 위해서 턴 것이니까 잡힐 땐 잡혀도 일단 튀고 봐야지요.
그래서 가방을 싸고 있는데 잠시후 전화벨이 울리더라구요.
"니 퍼덕 요 앞으로 나온나. 여 길가 입구에 공중전화다. 알았나?"
저 소지품 챙기고 잠이 덜 깬 아이 겨울 점퍼 입혀서 밖으로 나갔지요.
그리고 공중전화 부스에 양동이 들고 서 있는 남편을 만났습니다.
"와 이래 늦게 오노? 그라고 얼라는 와 델꼬 오노? 니만 오면 되제. 이거 들고 가라. 억시로 무겁데이."
남편은 이러면서 웬 자루를 주는데 억시로 냄새가 꿀리꿀리하게 나더만요.
뭐냐고 했더니 절보고 그러더라구요.
"뭐긴? 내 은행 털러 간다고 안 썼나? 아침밥은 다 차려놨제? 내 억시로 배고프데이."
'아! 그 은행이 그 은행이란 말인가? 준비는 그럼 아침밥 준비였나?'
그날 집으로 냄새 꿀리꿀리한 은행 가지고 온 뒤 서둘러 아침밥을 차렸지요. 남편이 그러데요.
" 이 은행이 천식. 기관지에 억시로 좋다카드라. 니 겨울 되면 잔기침 안하나? 꿉어서 많이 묵어라. 알았나?"
'어메, 고마운 거. 역시 신랑밖에 없는디.'
그날 아침밥 먹고 은행 까면서 남편한테 그랬지요.
"아잉 내 모른다 아이가. 내캉 당신이 진짜로 신용금고 털어 가 내 호강 시켜줄라는 줄 알고 억시로 놀랬데이."
그러자 남편이 제 머리를 쥐어 박으며 그러더라구요.
"니는 참말로 와카노? 우째 해가 갈수록 그래 어리삥삥하나? 참말로 우예 델꼬 살아야 할지 걱정이데이.
우예 저러노 참말로."
그러게 말입니다. 이 한국말이 들을수록 왜 이렇게 어려운 건지원!!
다른 댁도 그러신가요?
아님 저만 이러는 건가요? 하여간 감사합니데이.
은행 필요하마 전화 주이소. 억시로 많십니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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