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스티유감옥 습격
세계사를 질적으로 변화시키고, 인간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혁명이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혁명'입니다.
1789년에 열린 '삼부회'에서 표결방식에 불만을 품은 '평민대표'들이 별도 결성한 '국민의회'를
'루이 16세'가 군대를 동원하여 탄압하자 무력투쟁을 통하여 '국민의회'를 보호하고자 하는
'파리 시민'들이 무기확보를 위하여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사건을 발단으로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집니다.
'힘에는 힘으로 대항하자!' 저널리스트 <카미유 데물랭>의 선동에 파리시민들은
바스티유 감옥으로 몰려갑니다.
그들의 목표는 감옥 내에 있는 다량의 화약을 탈취하기 위해서 입니다.
프랑스는 '절대왕정'이 지배하던 '구체제'하에서 미국' 독립혁명'의 영향으로 시민들이 자유의식이
고취되어 있었고 '자본가 계급'이 급부상하고 있었던 차에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이 발생하고
'프랑스 혁명'의 발단이 된 '바스티유 사건'은 이듬해 1790년 7월 14일에 '프랑스혁명기념' 축제의 날로
이어지게 됩니다.
'바스티유감옥 사건'과 '절대왕정 체제 붕괴'가 발생하자 이에 놀란 귀족들은 망명길에 오르기 시작했고,
귀족들로 인해 번성했던 직업에 종사했던 이들이 일거리가 사라지며 갑자기 실업자가 증가합니다.
전년도의 기상이상으로 인한 '대흉작은 밀 수확량을 급감'하게 만들었고,
파리의 빵값이 치솟고 서민들의 궁핍한 생활이 이어지자 불만과 원망이 폭발되기 시작합니다.
◈ 베르사이유 행진 ㅡ10월 행진
10월 1일 '베르사이유'에서는 '플랑드르 군대(프랑스국경지대의 다국적 동맹군)'를
위한 호화로운 연회가 벌어지고 이 때 '프랑스혁명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삼색기'가
군인들에 의해 훼손당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소식을 듣게 된 파리 시민들은 다시 흥분하게되고, 특히 빵값 폭등으로 배가 고프고,
화가 난 여인들이 전면에 나섭니다.
10월 5일 7천여명의 여인들이 '파리 시청'으로 모여들어 "빵을 달라"고 외치며
'베르사유 궁전'을 향해 행진을 하게 됩니다. '파리'에서 '베르사이유'까지는 약 20km가
넘는 이 행진에 '국민방위대'도 동참합니다.
그날밤 이슬을 맞으며 노숙한 여인들은 다음날 궁전에 난입하여 국왕의 '파리' 귀환을 요구했고
국왕 일가는 군중들과 함께 파리로 이동하고 이후 국왕 일가는 파리 시민들의 감시속에
'튀틀리 궁'에 거주하게 됩니다.
◈ 상퀼로트 등장(급진주의)
경제는 심각한 불황으로 이어지고 가뭄으로 인한 흉작에 평민들의 불만이 가중된
1789년에 봉기한 시민과 농민의 민중혁명으로 3년간에 걸쳐 모든 체제를 전복시킵니다.
패전과 식량부족, 인플레 때문에 파리의 민심을 극도로 흉흉해지고,공채 '아시냐'는
가치가 40% 폭락했고 물가는 폭등하여 농민들은 곡식판매를 거부합니다.
소요가 계속 발생되고, 시민들은 당국에게 '공정 가격제의 시행'을 요구합니다.
이런 혼란속에서 도시에서는 '상퀼로트'가 등장합니다.
이들은 귀족 남성들이 입는 '퀼로트'(무릎까지 내려오는 반바지) 대신에 긴바지를 입고 다니며
붉은 모자와 긴 창을 들고 다니고, 도발적인 활동을 통하여 공포정치를 조장하기 시작합니다.
혁명을 급진적으로 이끌고 간 '상퀼로트'들은 대부분이 '소생산자, 소상점주, 노동자' 출신으로
혁명초기에 참정권을 인정받지 못했던 '무산계급'이 다수였으며
수동적 시민으로 분류되었던 계층입니다.
이들은 '자본집중 반대, 직접 민주주의를 통한 민중의 정치참여, 자유보다는 평등, 국왕 경멸,
국왕의 거부권 폐지, 공화제'등을 요구합니다. 이들의 활동은 급진적이고 과격했으며
이로 인해 '상퀼로트'는 대혁명 시기의 '급진적인 민중'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됩니다.
파리는 '상퀼로트'들이 주도하는 도시가 되었고 혁명은 급진화하여 민중혁명 단계에 들어갑니다.
'상퀼로트'들에 의한 '자치체'가 형성되어 이들의 압력으로 '왕당파 신문들이 폐간'되고,
'징발, 징집, 공정가격제'가 실시됩니다.
'감시위원회, 비상 인민재판소'가 설치되고 '선서거부파. 성직자'들의 추방, '종교의식 금지, 이혼 허용'등의
법령들이 통과 됩니다.이런 가운데 '프로이센군'이 8월 19일 국경을 돌파하여 9월 3일 '베르됭'이 점령 당합니다.
'프로이센군'은 곧 파리로 들이닥칠 기세였습니다.
파리 시민들은 충격을 받았고, 파리 침공에 대한 위기감이 한층 높아지자 자원 입대자가 증가합니다.
한편, 의용군의 출병 후 수감되어 있는 '반혁명주의자'들이 탈옥하여 '파리에 남은 가족을 학살할 것'
이라는 소문이 떠돌게 됩니다.
전선에 나가기 전에 '반역자'들에 대한 숙청이 결정됩니다.
9월초부터 모든 감옥을 돌아다니며 '반혁명자'로 의심되는 수감자들을 형식적인 '즉결심판'을 거쳐
잔인하게 학살합니다. 이때 살해된 사람은 대략 최대 1만 2천명 정도로 추산됩니다.
'프랑스 혁명'이 '구체제'를 무너뜨린 후 80년간< 공화정, 제정, 군주정>으로 국가 체제가 바뀌며
불안한 정치 상황이 지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뒤이어 이어진 '나폴레옹 전쟁(1796~1815)'과 함께
결국 유럽에 '민족주의, 자유주의'를 널리 퍼뜨리는 역할을 하게됩니다.
유럽과 세계사에서, 정치 권력이 '왕족과 귀족에서, 자본가계급'으로 옮겨지는,
새로운 시기가 뚜렷이 구분되는 전환점이 되는 사건입니다.
자본주의 발전기에 있어서 '시민 계급'이 '절대 왕정'에 저항하여 봉건적 특권 계급과 투쟁해서
승리를 쟁취하고,새로운 정부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 낸 최초의 사회 혁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루이16세는 좋은 '사람'이었을 뿐, 좋은 '군주'가 되진 못했다고 합니다.(1754~1793 38세)
프랑스 최초로 전기를 일으키는 기계를 들여왔고 '라틴어'를 비롯한 '여러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했으며,
'지리, 철학, 수학'은 물론 '시계나 가구들 만드는 취미'라고 평가된 것도 과학에 대한 그의 조예를 보여주는 증거로,
'쿼츠 시계'가 없던 당시에 시계는 고도의 기술력이 총동원되어야 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군주로서 제일 중요한 덕목이 크게 결여되어 있었다는 것인데,
리더십과 카리스마, 결단력이 부족하고, 서민들에겐 무관심한 군주였으니 설명이 필요없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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