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원짜리 첫사랑
사회

10원짜리 첫사랑

by 림프사랑 2022.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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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크림빵

 

요즘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영어, 피아노, 수학등 스케줄이 빡빡하게 짜놓고 학원 순례하며 

하루를 보내지만 예전의 국민학교(초등학교)시절 이야기를 해보렵니다.

그때 당시만 해도 부모나 자식이나 '언제 한번 고기반찬 먹어보나' 하며 살던 때라 학교 끝나면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며 진달래 먹고 물장구치고 그랬지요.

 

세월이 조금 지나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우리 집 형편이 조금 나아져서, 저는 용돈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하루에 10원! 용돈을 받은 그날부터 저는 그동안 꿈꿔왔던 일들을 하기로 했습니다.

당시 10원이면 크림빵을 사먹을 수 있었고, 만화가게를 가면 만화책 다섯 권을 빌려 볼 수가 있었지요.

 

저는 하루는 크림빵을 사먹고 하루는 만화가게를 가고 그렇게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로 옆집에 사는 남자아이가 저와 똑같은 스케줄로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죠.

그 아이도 하루는 크림빵, 하루는 만화가게를 저와 똑같이 다니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하루는 그 애가 저보고 이런 말을 건네더군요.

자기도 10원 받고, 나도 10원 받으니까 자기가 받은 걸로 크림빵을 사서 반으로 갈라서 나눠먹고

내가 받은 10원으로는 만화가게를 가서 만화책을 함께 보자는 겁니다.

 

자기가 만화책을 쫘악 펴놓고 볼 테니까 저보고 옆에 앉아서 보라는 거지요.

저는 그때까지 그렇게 똑똑한 아이는 처음 보았습니다.

그 순간 그 애가 갑자기 남자로 보이기 시작했고 전 그 애를 믿고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날 이후 우리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손잡고 구멍가게 가서 크림빵 하나 사들고 담모퉁이에 앉아

크림빵을 핥아먹으며 깊은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만화가게에 가서 머리를 맞대고 함께 독서를

했더랬습니다.

 

햇살 따스하던 그날도 엄마에게 10원 타서 집을 나섰습니다. 

그 애와 함께 만화가게에 가려고 옆집으로 가서 그 애를 부르려 하는데 갑자기 그 애가 

대문을 박차고 나오더니 제 손을 잡고 냅다 뛰기 시작했습니다.

 

연산군(1962)

 

그렇게 저를 데리고 간 곳은 바로 극장이었고, 제목이 '연산군'인가 그랬는데 커다란 스크린에서는

임금님도 나오고 어마마마도 나오고 내시도 나오고 그리고 긴 칼을 번쩍거리며 휘둘렀습니다.

집에 TV도 없었던 그 시절 저에게는 너무도 큰 감동이었습니다.

 

극장에서 나와서 그 애는 맛있는 국수도 사주었고, 예쁜 꽃핀도 하나 사주었지요.

돈이 어디서 났냐고 물으니까 자기네 집은 원래 부자라고 하더군요.

알고 보니 그 애는 똑똑한데다 돈까지 많았던 거였습니다.

 

그렇게 부자처럼 펑펑 돈을 써댄 우리는 밤이 늦어서야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날 밤 극장에서 본 임금님을 떠올리며 그 애가 사준 머리핀을 손에 꼭 쥐고 잠이 들 무렵,

옆집에선 고요한 밤하늘을 가르는 비명소리가 한동안 들렸습니다.

 

"아악~~으아악~~, 나죽어! 살려 주세요~ 퍽! 으악~!"

다음날 학교에 가려고 집을 나서는데 그 애가 퉁퉁 부은 눈에 얼굴은 군데군데 멍들어 있었고

다리를 절룩거리며 제 앞에 나타났습니다.

 

이제 내 남자다 싶은 그 애가 그 꼴로 나타나니 제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왜 이렇게 되었냐고 물었더니 어젯밤에 자기네 집에 도둑이 들었다더군요.

그 도둑이 돈을 훔쳐 달아나는 순간 자기가 발을 걸어 넘어뜨려 싸워서 물리쳤다는 거였습니다.

 

저는 평펑 울었습니다. 사랑이 저를 아프게 했으니까요.

그 애의 멍든 얼굴이 나를 울렸고, 그 도둑이 너무 미워서 울었고, 도둑을 물리친 그 애가 너무

멋있어서 울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이후 그 애 엄마가 볼 때마다 저를 째려보시곤 하시데요.

저는 '정말 웃기는 아주머니야' 하고 말았지요.

그 후로도 얼마동안 우리는 '10원짜리 사랑'을 나누며 행복했었습니다.

 

겨울방학이 되어 동생을 데리고 조치원에 있는 큰집으로 방학을 나러 가게 되었습니다.

방학이 끝날 즈음 집으로 돌아온 저는 엄마께 하늘이 무너지는 말을 듣게 되었지요.

그 애가 도시에 있는 중학교로 가기 위해 얼마 전에 이사를 갔다고 하는 겁니다.

 

저는 심한 배신감에 치를 떨었지만 그 후로 그 애를 볼 수가 없었지요.

그 애 없는 삶은 너무도 암울했습니다. 더러운 게 정이라고 매일 함께 다니던 만화가게랑

함께 먹던 크림빵을 그날 이후로 딱 끊어버렸습니다.

 

가끔 금단현상이 나타났지만 독하게 끊어버렸습니다.

세월이 흘러 소녀에서 숙녀로 변신하면서 저는 남자를 깊이 사귈 수가 없었습니다.

'008미팅' 이니 '성춘향', '이도령' 미팅이니 하는 것도 해봤지만 제 마음 속 깊이 자리잡고 있는

그 애와 비교가 되어 그 어떤 남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 애처럼 큰 키에 넓은 어깨, 돈 많고, 머리 좋고, 거기다 용감하기까지 한 그런 남자는 없었으니까요.

어느새 세월만 흘러 스물일곱이 되던 따스한 봄날 소꿉친구 결혼식이 있어 예식장엘 갔습니다.

 

그런데 그 예식장에서 그 애 아버지를 봤습니다. 

희끗희끗한 머리에 불룩한 배, 짧은 다리에 그 특이한 팔자걸음까지 분명, 그 애 아버지였어요.

한 순간도 잊지 않고 살았던 내 10원짜리 사랑, 내 첫사랑! 아 이제 내 인생 풀리려나보다 하며

몹시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아버님께로 다가갔습니다.

 

세월이 십수년이나 흘렀는데도 그 옛날 그 모습 그대로 팽팽하셨습니다.

저는 다짜고짜 인사를 꾸벅 하고는 어쩌면 시아버지가 될지도 모를 그 분께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

얌전하고 공손하게 여쭈었습니다.

 

"저...혹시 저를 알아보시겠어요? 십오년 전에 제가 아버님 옆 집에 살았거든요. 금희이라고..."

아버님 표정이 환해지시며 마치 며느리를 맞이하는 듯한 반가운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셨습니다.

"맞으시죠? 종현이 아버님 맞으시죠. 어쩜 이렇게 하나도 안변하셨어요? 더 젊어지신 것 같아요.

종현이는...잘 있나요? 지금 어디 사세요? 여기 어떻게 오셨어요?"

 

 

 

횡설수설하는 저를 진정시킨 건 아버님의 한마디였습니다.

"금희야~, 나야, 종현이야."

그 애는 초등학교 6학년 이후로는 키는 자라지 않았고, 머리는 고등학교 때부터 하얗게 세어 가고,

배는 군대 갔을 때 나오기 시작해서 자리 잡은 것이 영 빠지지 않는다 했습니다.

 

이럴수가...차라리 만나지나 말 것을 그렇게 내 첫사랑은 심한 충격과 함께 끝이 났습니다.

그렇게 사랑은 끝이 난거죠. 내 상상 속의 사랑은요.

그런데 그렇게 끝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이야기가 거기서 끝났어야 하는데 그 늙수그레한 배불뚝이 흰머리 총각은 너무도 아름답게 성장한 저를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날마다 꽃 한 송이씩 바꿔들고 집 앞으로 출근을 했고 그동안 한시도 잊은 적이

없노라며 눈물의 편지도 매일매일 보내왔습니다.

 

아, 10원짜리 내 인생! 그 인간 그러다 급기야 죽어버리겠다고 협박까지 하지 뭡니까.

그래서 저 이 나라를 뜰까하고도 생각했었습니다.

저도 제 나름대로 상상했던 사이즈와 스타일이 있었는데 도저히 그 사람 수준으로는 타협이 안되었으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그 사람이 어머니를 모시고 저를 찾아왔습니다. 언뜻 보면 꼭 부부 같더군요.

그리고는 많은 이야기를 하십니다. 밥도 안먹는다고, 매일 운다고, 알고 보면 착하다고, 자세히 보면 귀엽다고

억지를 부리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 옛날 저와 매일 만화방을 다니던 그 시절 크림빵을 사면 반으로 쩍 갈라서 크림이 많은 쪽을 꼭 저를 줬다고

그리고 어느 가게 집에 붙어 있는 영화포스터를 보고 제가 그랬답니다.

"야~저거 되게 재밌겠다. 나두 저 영화 보고 싶다."

그 말 한마디에 그 사람이 집에 있는 돈 훔쳐 들고 나와 제게 영화를 보여줬답니다.

 

그리고 그날 죽어라 두들려 맞았고, 저 때문에 아들놈 도둑 만들까봐 멀리 이사를 하셨다 하시면서

옛 정을 생각해서라도 결혼하는 게 어떻겠냐고 하셔서 결혼했습니다.

자세히 보니 귀엽더군요. 그렇게 저는 10원짜리 첫사랑과 결혼했습니다.

지금은 아들 둘 낳고 잘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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