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세계 7대 불가사의
사회

중세 세계 7대 불가사의

by 림프사랑 2022.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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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세계 7대 불사사의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중세 시대의 7대 불가사의라는 목록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중세(Medieval)란 대략 서기 1000년에서 1450년 사이 기간을 말한다.

 

이 목록은 17세기까지 유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세 시대에 만들어진 것은 아닌 듯하다.
더욱이 카타콤은 20세기 초반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1.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콤 엘 쇼카파>의 지하묘지(카타콤)

2019년 3월에 공개된 카타콤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사용한 지하 무덤으로 이 무덤은 로마제국이 이집트를 지배하던 약 2000년 전 만들어졌다. 최근 미국국제개발처(USAID) 등 국제 고대유물 복원기관들이 이 무덤을 복구했고 이집트 정부가 일반인에 첫공개했다.

 

들어가는 입구 기둥 양쪽에는 뱀 모양의 아가토 데몬(고대 그리스 신화의 건강과 행운의 혼령)부조가 있다.

뱀의 머리에는 이집트의 상징인 2중 왕관인 프스켄트를 쓰고 있고, 몸통 왼쪽에는 로마의 신의 사자의 지팡이인

카두세우스가 있고, 오른쪽에는 그리스 신화 바커스의 지팡이가 놓여 있다.

또한 뱀 머리 위에는 메두사(어떤 생명체든 메두사가 보면 돌로 바꾼다)가 무덤을 지키고 있다.

 

1900년에 나귀가 끌고 가던 수레바퀴가 지하로 빠지면서 우연히 발견되었다고 한다.

<콤 엘 쇼카파>이 말은 '토기 파편의 언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즉 카타콤이 있는 자리가 적갈색 토기인 테라 코타의 조각을 버리는 언덕아래에서 발굴된 지하 무덤이라는 뜻.

 

 

고대 이집트 양식과 1세기 프톨레마이오스 시대(그리스), 4세기 로마 제국 시대의 건축 및 복식 양식을 갖춘 곳으로

1세기 경 개인의 무덤으로 조성되었다가, 그 후 공공의 카타콤으로 전환되면서 규모도 커지고 4세기까지 공동묘지로

사용되었다

 

카타콤은 이집트가 그리스와 로마의 지배를 받았던 시대에 만들어진 지하 무덤이다. 

이집트 파라오 시대의 장례 제단이 있는데, 기둥과 천장은 로마의 건축 양식으로 만들어져 있고, 고대 이집트의 신상과

석상의 옷과 헤어 스타일은 로마의 양식을 하고 있다.

 

2. 중국 난징 영곡사의 영곡탑

 

 

영곡탑 혹은 자기탑 난징에 있는 탑으로, 대보은사의 일부였다. 중국 난징에 위치해 있으며, 15세기 명나라 시대에 건축되었다. 1801년에 영곡탑은 낙뢰를 맞고 맨 위 4층이 불타 버렸으나, 곧 복구되었다.

 

1843년에 유럽 모험가에 의해 발간된 책 속 내용에는 19세기 아름다운 영곡탑의 모습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을 정도로 이 영곡탑의 명성은 잘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후에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났고, 반란군들이 난징을 점령한 후 이 탑은 망가뜨려졌다. 그들은 절의 불화들을 부수었고, 청 황실을 부정하기 위해 탑 내부의 계단을 모두 헐어 버렸다.

 

2년 후, 반란군들은 청나라 군대가 이 탑을 점령하여 그들을 감시하지 못하도록 이 탑을 완전히 불태워버렸다.

이후 탑과 사찰에 쓰였던 자재들은 모두 다른 곳에 쓰기 위해 헐려 나갔고, 최근까지 빈 터로 남아 있었다.

 

 

2010년에 한 중국 사업가가 난징시에 영곡탑을 복원하기 위해 1억 5600만 달러를 기부하였다.

이는 중국 역사상 개인이 낸 기부금 중 가장 많은 액수이며,

2015년에 복원된 영곡탑과 그 주변 일대가 대중들에게 개방되었다.

 

3. 중국의 만리장성

 

 

만리장성(萬里長城)은 중국이 북방 유목민족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지은 성벽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건축물이다. 중국에서는 장성(長城)이라고 부르고, 서양에서는 ‘중국의 성벽(Wall of China)’ 또는 ‘대성벽(Great Wall)’이라고 칭한다.

춘추전국시대에 북방과 국경이 맞닿은 연·조·진나라는 기원전 5세기경부터 북쪽에 성벽을 건설했는데

기원전 221년 진의 시황제가 중국 통일 후 이를 하나로 연결한 것이 장성의 시작이다.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북방과 남방의 경계선 역할을 한 장성을 강화하기 위해 보수하거나 개축했는데,

명나라 시기에 이르러서야 오늘날의 만리장성이 완성됐다. 장성은 전쟁이 없던 시절에는 교역 시 발생하는 관세를 거둬들이는 장소로 사용됐다가 유사시 병사들의 군사 거점으로 활용됐고, 장성에 설치된 봉수대는 적의 침입이나 긴급한 상황을 알리는 통신수단으로 사용됐다.  

중국의 거리 단위인 리(里)는 0.5㎞다. 장성의 총 길이는 1만1300리(5660㎞)로 1만 리(약 4000㎞)를 넘는다. 장성의 폭과 높이는 지어진 지형과 군사적 중요도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고비 사막이나 북방에 건설된 성벽은 폭이 1~2m에 불과하지만, 베이징의 바다링 지역은 성벽을 모두 2~3중으로 쌓았고 폭도 3~10m에 달한다. 높이의 경우 낭떠러지 같은 곳은 3~4m이며, 주요 요충지는 8m가 넘는 곳도 있다. 한때 ‘우주에서도 보이는 유일한 건축물’이라는 속설이 있었으나, 지난 2004년 12월 8일 중국과학원은 “사람의 눈으로는 우주 공간에서 만리장성을 관측할 수 없다”고 밝혔다.

 

4. 터키의 이스탄불 '아야 소피아'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537년 12월 27일 당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축성하는 가운데 약 5년 10개월 만에 하기아 소피아의 완공을 선포했다. 완공식을 마치고 성당에 들어간 유스티니아누스는 말했다. “솔로몬이여, 제가 당신을 이겼습니다.” 그러나 워낙 빠르게 공사를 마무리한 탓에 내부 모자이크 공사는 몇십 년이 지난 유스티니아누스 2세때 가서야 완성되었다.

하기아 소피아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구의 소재지였고, 동로마 제국의 황실 성당으로 이용되어 황제의 즉위식, 결혼식과 같은 제국의 중대 행사가 이곳에서 열렸다. 또한 이곳은 절대적 성소로 치부되어, 범죄자들이 안으로 들어오면 군대라 할지라도 그를 함부로 잡아갈 수 없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한 순례자들의 기록을 보면, 대성당 안에는 현재는 없어진 시설이나 성유물이 상당수 있었다.

14세기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한 러시아인 기록에서는, 대성당 내부에는 많은 예배당이 있었고, 노아의 방주에 쓰였던 목재로 만들어진 문, 성 십자가, 아브라함의 탁자 등 많은 성유물이 안치되어 있었다. 

 

정식 명칭은 하기아 소피아 그랜드 모스크이다.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동방 정교회 대성당으로 세워졌으며,

현재는 이슬람 모스크(모스크는 이슬람교의 예배 및 집회 장소)이다.로 사용 중이다.

537년 1453년 까지는 그리스 정교회 성당이자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의 총본산이었다. 

 

다만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라틴 제국에 의해서 점령된 1204년부터 1261년까지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당으로 개조되었다가 이후 다시 정교회 성당으로 복귀하였다.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1453년부터 1931년까지는 모스크로 사용되었고, 1935년에 박물관으로 다시 개장했다.

 

허나 2020년 7월 10일에 에르도안 대통령의 지시로 다시 박물관에서 모스크로 바뀌었고, 

현재까지 남아있는 비잔티움 건축의 대표작으로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건축물로 여겨지고 있다.

로마 제국의 건물이라고 하여, 기독교의 문화유산으로만 생각할 수도 있으나, 이슬람교와도 관련이 크며,

500년 가까이 이슬람교 신자들의 예배당으로 사용되었다. 성당 옆에 있는 4개의 탑들은 미나레트라고 부른다.

 

5.이탈리아 피사의 사탑

 

 

피사의 사탑

1173년 기공
1372년 완공
가톨릭 성당 종탑
높이 55.86m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지반 침하의 사건으로 현재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게 되었다.

이 기울기의 원인은 지반 토질이 불균형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탑의 남쪽이 크게 내려가게 되었는데,

이것은 남쪽의 토질이 상대적으로 부드러워 시간이 지나면서 기울기가 시작되었고, 이것으로 인해

회전각운동량이 증가하여 더욱더 지반에 대한 부담이 커지게 되어, 침하가 진행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 것이다.

 

1990년에 안전상의 문제로 공개는 금지되고, 경사각을 수정하기 위해 재공사가 진행되었다.

처음엔 침하한 쪽과 반대인 북쪽에 저울추나 종을 달아 균형을 맞추려고 했으나 근본적인 해결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 후 재공사 공법에는 세계 각국의 건설회사들로부터 여러 가지 제안이 나왔으나,

최종으로 북쪽 지반을 깎는 공법이 채용되었다.

 

2001년 10년간에 이르는 작업이 종료되었고,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이후, 보수공사는 사탑이 완전히 쓰러지지 않을 정도로만 이뤄졌지만 이제는 사탑이 자체적으로 균형을 잡기 시작했다.

사탑이 이론상으로는 앞으로 완전히 직립할 수 있지만, 200년 내지 300년간은 계속 기울어져 있을 것이다

 

6. 이탈리아 로마 콜로세움

 

원형극장(Amphitheatre)이라고 하는 건축물로 서기 80년경 완공되었다. 원형극장도 두 종류가 있어서 하나는 콜로세움처럼 검투사 경기나 서커스 관람 등을 하는 스타디움의 개념인 앰피시어터가 있고, 다른 것으로 원형 좌석이 있어서 희곡, 연주 등을 행하는 예술적 상영장인 앰피시어터가 있다. 콜로세움은 전자의 것으로, 로마가 건축한 것 중에서 가장 큰 원형극장이다. 또한 간과하기 쉬운 사실로 완전한 원형이 아니라 타원 모양이다.

 

1980년 로마 역사 지구 - 바티칸 시국의 유산들과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이라는 이름으로 로마 전역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면서 로마 안에 위치한 콜로세움도 역사 지구에 포함되어 등재되었다.

 

세계적 유적지인 이탈리아 로마의 콜로세움에서 지금은 사라진 경기장 바닥을 나무판으로 재건하는 방식으로

1천500년 전 검투사들이 섰던 무대를 되살려낸다.

영국 일간 더타임스, BBC 방송에 따르면 이탈리아 정부는 콜로세움 바닥에 3천㎡ 면적으로 나무판을 까는 작업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여기에는 1천850만 유로(약 249억원)가 들어가며, 2023년 마무리될 예정이다.

고대 로마 시대 원형 경기장 가운데 최대 규모를 자랑하며, 매년 약 640만명이 찾아오는 관광 명소다.

 

7.영국의 스톤헨지

 

스톤헨지는 원형으로 늘어선 돌기둥(환상열석/環狀列石)으로, 보통은 영국 솔즈베리 평원에 있는 것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쓰인다. 원형의 흙 구조물 한가운데 거대한 바위들을 여러 형태로 세워 배열한 선사시대 유적지이다.

이 거대한 입석(立石) 구조물은 평균 7미터 높이, 깊이 1.4미터 도랑에 둘러싸인 원형 광장을 지칭하는데,

스톤헨지의 안쪽 지름은 98미터이다. 그리고 그 구성은 둥근 고리 모양으로 줄지어 서 있는 거대한 열석과 동북 방향으로 U자 형태로 벌어진 거대한 돌의 조합으로 구성된다.

스톤헨지(Stonehenge)라는 영어 명칭은 중세 시대에 붙었다.

솔즈베리 스톤헨지 외에도 이와 비슷한 돌기둥 무리가 영국과 아일랜드 각지에 분포한다.

 

영국의 미스터리한 유적지 중 하나인 스톤헨지의 대사암의 거석이 어디에서 유래했는지에 관한 미스터리가 밝혀졌다.
영국의 고고학자들은 스톤헨지의 사암 대부분이 약 15마일 (25km) 떨어진 말보로 (Marlborough) 근처 웨스트우드 (West Woods)에서 가져와 사용된 것을 밝혀냈다

스톤헨지 대사암은 평균 7미터 높이에 20톤가량의 무게로 기원전 2500년경에 세워졌다

스톤헨지 내 작은 청석(블루스톤)의 기원은 <웨일스 프리셀리 언덕>이라고 이미 밝혀진 바 있다. 

하지만 스톤헨지 대사암 거석의 기원이 밝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스톤헨지는 유네스코 세계  유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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