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올림픽 개막식에서 비둘기가 날고 성화가 타오른 다음 애국가가 장엄하게 울려퍼질 때,
이를 보고 있던 서양할머니 한 분이 손수건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내고 있었습니다.
한국 애국가가 울려 퍼질때 서양할머니가 왜 눈물을 흘리고 있을까?
할머니 나이는 70세, 국적은 스페인, 이름은 <마리아 돌로레스 탈라베라 안>!
1936년 8월 1일, 나치 치하의 베를린 올림픽 개막식이 끝나고 일장기를 단 한국선수 <김용식>,
<이규환>,<장이진>, <손기정>, <남승룡> 등이 모여앉아 잡담을 하고 있었을 때.
그 자리에 재독동포 한 사람이 헐레벌떡 달려왔습니다.
억센 평안도 사투리로 자신이 지었다는 '조선응원가'를 불러주겠다면서
구깃구깃한 악보 하나 꺼내들고 손짓, 발짓, 고갯짓으로 장단을 맞추어가며 그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조선응원가'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그런 일이 있은 지 보름 후에 마라톤의 손기정 선수가 1위로 경기장 안에 뛰어들자
스탠드 한쪽에서 돌연 이 노래가 흘러 나왔습니다.
서너 명의 재독동포 앞에서 미치광이처럼 두 손을 저으며 지휘하고 있는 이는
바로 보름 전에 '조선응원가'를 불러주던 바로 그 젊은이였습니다.
그 젊은이가 바로 안익태였던 것입니다.
그는 베를린 올림픽 두달전에 지금 우리가 부르고 있는 애국가의 작곡을 완성하고 있는데
올림픽에 조선선수들이 참가한다는 소식을 듣고서 조선응원가로 임시변통을 한 것입니다.
이 애국가를 짓게 된 동기는 이렇습니다.
그가 미국 커티스 음악학교에서 작곡을 공부하고 있었을 때 샌프란시스코의 한국인 교회를
들른 일이 있었죠. 그 교회에서 부른 애국가 곡조가 이별할 때 부르는 슬프디 슬픈 스코틀랜드 민요였다고 하네요.
슬픔을 이겨내고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애국가 곡조가 절실하다고 생각한 그는 전세계 40여개 국가를
수집.검토해 가며, 5년 만에 지어낸 것이 베를린올림픽 개막식에서 처음 불렀던 바로 그 애국가인 것 이라고 합니다.
1948년 정부수립과 더불어 정식국가로 채택되었을 때 안익태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이런 편지를 띄웠습니다.
"이 애국가는 본인이 지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지으신 것입니다. 본인은 다만 하느님의 영감을
대행한 것 뿐입니다"
나라 없이 출장한 올림픽 개막식에서 처음 불렀던 그 노래를 ㅡ, 지금은 별세하고 없는 안익태씨의
미망인 <마리아 돌로레스 탈라베라 안>여사가 서울올림픽 개막식에서 어찌 눈물없이 들을 수 있었겠는가!
개막식의 애국가는 우리 민족 모두가 울먹였어야 했던, 그때와는 다른, 한층 성장된 나라의 애국가였던 것입니다.
스페인 출신인 여사는 1946년 마요르카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부임한 안 선생과 결혼했으며,
안선생(1906~1965)이 59세를 일기로 작고한 뒤에도 한국 국적을 보유했다고 합니다.
안여사는 2005년 내한해 ‘애국가’ 저작권을 한국 정부에 무상으로 기증했습니다.
당시 외손자 미겔 익태 안 기옌 씨는 “할아버지께서 한국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국민이 언제나 부를 수 있도록 애국가를 만드셨기 때문에 당연히 애국가는 한국의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안익태선생의 재조명
⊙ 1935년 미국 유학 시절 애국가 作曲, 1937년 한국환상곡 만들고 이듬해 아일랜드서 初演
⊙ 불법취업자로 판단한 美 당국, 체포영장 발부ㆍ조사 후 추방 위협
⊙ 한국인 최초로 세계적 교향악단을 움직인 지휘자이자 우리 가락을 서양에 알린 작곡가
⊙ “일본 영사관과 트러블 안 일으켰으면… 안익태는 하루 종일 음악만 하는 사람”
⊙ “음악은 국제적인 언어이며 나라의 경계를 넘어 인간을 하나로 뭉치게 한다”
⊙ “親日 논란… 한 인간에 대한 평가 黑白으로 구분할 수 없어, 단순화시키면 역사왜곡 일어나”
⊙ 2014년 1월 강창희(康昌熙) 국회의장 시절 헌법개정자문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은 ‘헌법 개정안(案)’을 내놓았다. 헌법 개정안 4조는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제4조 ①대한민국의 국기는 태극기이다. ②대한민국의 국가는 애국가이다. ③대한민국의 국어는 한국어이다. ④대한민국의 수도는 서울이다.〉
안익태 선생의 생애 (1906~1965:평양출생)
시기별로 보면 10대 학창 시절
20대 초반의 일본 유학기(期), 20대 중반의 미국 유학기, 30대 유럽활동 시기, 40대 이후 스페인 정착기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20년 이상을 보낸 스페인 정착기라 할 수 있다.
안익태 선생은 스페인에서 젊은 여성을 만나 결혼, 딸 셋을 뒀다.
안여사의 일기<나의 남편 안익태>ㅡ1955년 모국에 다녀왔을때 한국환상곡을 지휘했던 소감
〈여보, 난 살아 있다는 사실에 정말 고마움을 느꼈소. 산다는 것은 정말 기쁜 일이고, 언제나 고생을 참고 견디면 이에 대한 보상이 있게 마련이거든. 당신도 내가 한국에서 애국가와 한국환상곡을 지휘했다는 사실이 내게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겠지.〉
안여사의 일기<나의 남편 안익태>ㅡ 안익태 선생은 모국에서의 첫 연주 직후 일본으로 건너가 음악회를 연다.
이때도 한국환상곡을 연주하는데 일본인 합창단이 한국말로 우리의 애국가를 부르는 것을 직접 지휘한다.
일제 치하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한 것은 말이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속된 것이 아니고 바로 이런 것이었소. 즉 음악이라는 것은 사람들의 뜻을 합치게 함으로써 모두가 한 형제처럼 서로 사랑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것 말이오. 내가 그들 머리 앞에서 군도(軍刀)를 휘둘렀더라면 아무도 노래를 부르려고 하지를 않았을 거요. 그러나 지휘봉을 드니까 두말없이 노래를 불렀거든. 그것도 아주 열성과 애정과 성실성을 가지고 말이오. 여보, 이제 내 말뜻을 알아듣겠지. 결국 두 나라는 음악을 통해 형제국이 된 거요.〉
안익태 선생의 음악관은 ‘음악은 인류화합의 도구’라 요약할 수 있다. 그는 “음악은 국제적인 언어이며 나라의 경계를 넘어 인간을 하나로 뭉치게 한다”고 늘 강조했다. 그의 음악관(音樂觀)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안익태의 음악관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현실을 직시한 예술가 정신’이다. 재능이 없는데도 허영심에 빠져 예술을 하는 것은 국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안익태선생이 돌아가신 후에도 한국에서는 안선생에 대해 말이 많았습니다.
친일주의, 친나치주의라는 말들이 나온 이유가, 즉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시기에 세계적 명성을 지닌 지휘자들도
히틀러를 위한 음악회를 지휘하곤 했었죠, 일본의 식민지 출신인 안익태선생이 선택할 수 있는 생존방법은
일본 측 요구에 순응하는 길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지휘자의 악기는 '오케스트라' 그 자체라고 합니다.
당시에는 오케스트라가 국립, 즉 국가 소유의 음악단체였습니다.
국가 소유의 음악 악기를 연주하려면 국가의 뜻에 일정 부분 따를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의 삶을 돌아볼 때 그의 위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국내 음악계가 무관심한 것은 국내에 입성한 후에도
안익태 제자들이 없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겠지만, 자기 주장이 강했던 때문이라고 합니다.
세간의 무관심과 음악계의 ‘홀대’에도 허영한(許英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20년 넘게 안익태 선생의 생애를 추적, 연구해 왔다. 그는 1998년부터 음악 학술지를 통해 안익태 선생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꾸준히 알려 왔다고 합니다.
허영한 교수는 “안익태 선생은 음악인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아온 분”이라고 했다.
“현재 한국인으로서 세계에 이름을 날리는 음악인이 많지만 1930~40년대 당시 안익태 선생의 명성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안익태 선생에 대한 몇몇 평가가 있지만 정치와 이념, 또 국경을 넘어선 세계적 음악인으로서 그를 재평가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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