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화가로 소문난 화가 윈스턴 처칠
사회

유령화가로 소문난 화가 윈스턴 처칠

by 림프사랑 2022.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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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화가로 40세이후부터 그림에 심취한 윈스턴 처칠!!!


처칠의 감성적 화풍ㅡ자연과 함께한 50년 세월

정치가이며 문학가이며 화가였던 처칠(1874~1965)

 

영국 런던 아마추어 미술 전시회에서 1위로 뽑힌 화가 <찰스 모린>은

그당시  2년전 사망한 화가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럼 그 작품은 누구의 작품인가? 궁금했던 유령화가로 소문이 자자했던 26여년이 지난

1947년 드러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데이비드 윈터>라는 가명으로 출품한 [윈터 선샤인]이라는 작품으로 <영국왕립아카데미> 정식 회원으로

인정받으면서 <찰스 모린>,<데이비드 윈터>로 활동한 작품 모두 윈스턴 처칠의 작품임이 밝혀진 것이었죠.

 

 

처칠은 전쟁에 대패한 이후 극심한 우울증으로 괴로워 했다고 합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중 해군 장관이었는데, '갈리폴리 상륙작전'에서 실패하면서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1915년 내각에서 사임 당한 뒤, 시골에 내려가 있을 당시 1920년대부터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나이 40세에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90세까지 붓을 놓지 않고 그림에 열중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가 그림을 그려야 했던 것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는 일 때문에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집 근처에는 기차가 지나는 철길이 있었는데, 스스로 난간에서 철길로 뛰어내리고 싶은 자살충동을

억제하려 애를 쓰기도 했다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그의 자식들은 우울증으로 자살을 하거나, 불행하게 죽기도 했습니다.

처칠은 그림을 통해서 마음을 진정 시키기 시작하고, 자연을 통해서 삶에 대한 위로를 받기도 하면서

풍경화를 위주로 많이 그렸습니다.

 

이른 나이에 정치에 입문한 1940년 총리로 당선된 후 두 차례 총리직을 역임합니다.

그러면서도 처칠은 그림 그리기는 놓지 않고 계속이어 나갑니다. 

그가 선택한 자연에서 심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습니다.

 

 

그러던 중 1921년, 화가 처칠은 한 전시회에 자신의 풍경화를 냈습니다.

본명이 아니라 찰스 모린이라는 이름으로 참가했습니다.

<찰스 모린>은 영국 아마추어 미술전시회에서 1위를 했었다고 설명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 그림이 처칠의 그림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 그림은 이미 얼마 전에 다른 전시회에 처칠의 이름으로 걸렸던 그림 임에도

사람들이 자세히 보지 않아서 알아채지 못했다고 합니다.

 

 

화가 '찰스 모린'은 1919년에 죽은 프랑스의 풍경화 화가였습니다.

그런데 처칠은 왜 이미 죽은 화가의 이름으로 전시회에 그림을 걸었을까요?

처칠의 그림이라고 이름을 내걸면 심사에 부담을 줄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같은 화풍의 화가를 찾았던게 <찰스 모린>이었습니다.

 

 

화가 처칠이라고 부르지만, 윈스턴 처칠 자신은 스스로 전문 화가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취미로 그렸던 아마추어 그림이라고 표현했으니,

그에게 그림 그리기는 실제로 마음의 안정을 위한 것이었음이 분명합니다.

 

현재 미국에서 화가 및 조각가 활동 중인 처칠의 손녀 증언에 의하면 그림 솜씨도 괜찮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20세기 최고의 화가로 불리는 '파블로 피카소'가 처칠의 그림을 보고는 그림으로 먹고살아도 되겠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처칠은 주로 여행을 하며 그림을 그렸습니다. 우리가 여행을 가면 사진을 찍듯이 그림을 그려오곤 했다는 것입니다.

화가 처칠은 평생을 통해 500점의 그림을 그렸고 후반에는 그냥 자신의 이름 그대로 그림을 소개하기도 합니다.

 

 

현대에 들어와서 처칠의 그림은 엄청난 가격에 팔리고 있습니다. 그의 그림은 적어도 2억~3억 원에 이르며,

최고 30억 원에 불리기도 합니다. 물론 처칠의 그림이라는 플러스 요소는 분명히 있습니다.

 

사실, 전문 화가들은 처칠의 그림을 보고 잘 그리는 아마추어 수준이라고 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처칠의 그림을 사는 사람들은 인간으로서의 삶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처칠은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면 처음 맞는 백만년 동안은 그림만 그리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화가 처칠에게는 그림이 마음의 안정을 주는 필수불가결한 선택이었습니다.

그가 블랙 독이라고 불렸던 스트레스와 정치적 우울증에서의 해소방안 이기도 했습니다. 

 

 

윈스턴 처칠의 인물화는 풍경을 배경으로 한 몇 점에 불과했습니다.

사람들이 인물화는 왜 안그리느냐? 물어보면,

그는 나무들은 실물과 다르게 그려도 불평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림에도 소질이 있구나 하고 놀라지만, 처칠 스스로에게는 절박한 피난처였던 것입니다.

 

 

 

​<카시스의 새벽>, <피라미드의 먼 전망>, <에즈 요새의 전망>, <칸 위의 폭풍>, <차트웰의 금붕어 연못> 등

주로 풍경화를 그린 따뜻한 색감과 섬세한 표현력을 두루 갖췄다는 평을 듣습니다.

 

처칠의 유작으로 남은 경호원에게 선물한 그림 2017년 <소더비 경매>에서 한화로 약 5억 3천 만원에

낙찰되기도 했답니다. 3억에서 30억에 이르는 그의 작품엔 윈스턴 처칠의 50년 세월이 정치와는 또 다른,

자연과 함께 인간적으로 녹아내린 소중한 삶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500점 이상의 작품을 남기고 91세 나이로 세상을 떠난 영국의 인상주의 화가 윈스턴 처칠!

지금은 하늘나라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지구를 쳐다보며 그림을 그리고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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