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Apple I을 개발했을 때 당연히 이것을 받아주려는 가게는 없었는데 이때 컴퓨터라는 것은 큰 회사나 대학, 정부기관에서만 쓰는게 일반적 이었고 PC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정의도 되어 있지 않던 시절이다. 모니터고 뭐도 없이 요즘으로 치면 컴퓨터 본체만있는 기기입니다.
사실 Apple I은 거의 '기판만 있는 물건'이라 케이스 등은 자작 해야 하므로 거의 요즘으로 보면 '기판 키트' 수준의 물건이었다고 합니다. 이후Apple II, Apple II Plus 등 후속 모델들이 차례로 성공하면서 스티브 잡스는 명성과 부를 얻게 됩니다.
Apple II는 <코모도어64>에 도전을 받기 시작하며, 워즈가 만들지 않았고, 잡스의 개입이 심했던 AppleIII는 실패합니다
Apple III가 망하자 잡스는 GUI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며 LISA 프로젝트와 매캔토시 프로젝트를 동시에 시작합니다. 원래 잡스는 자기 딸의 이름까지 붙인 Lisa 프로젝트를 맡고 있었다가 Lisa 팀에서 쫓겨나서 매캔토시 프로젝트를 담당하게 됩니다.
이후 잡스는 자신을 쫓아낸 Lisa 프로젝트에 대한 경쟁심이 불타오른 나머지 Macintosh에게 지대한 관심을 쏟기 시작하며 주 90시간 근무를 시키는 등 Apple II 팀, Lisa 팀, Macintosh 팀은 서로 경쟁하기 시작합니다.
이후 내적인 분할과 갈등은 1985년 자신이 설립한 회사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갓 들어온 존 스컬리와 계속해서 의견 충돌을 일으켰고, 이에 스컬리를 쫓아내기로 결심한 잡스는 과감하게 이사회에서 투표를 걸었는데, 이미 사건 사고들로 인망을 잃을 대로 잃었고 실적도 부진했기 때문에 지고 맙니다.
이익을 보고 움직이는 이사회가 왜 잡스를 잘랐겠는가?
이익은 커녕 손해만 내는 짓을 하고 있어서라고 합니다. 물론 잡스의 독선적이고 통제 불가능한 성격도 한몫했다고 합니다.
쫓겨날 때 엔지니어 몇 명을 같이 데리고 나와 <NeXT>라는 회사를 차리고 워크스테이션 개발에 매진합니다.
잡스가 온갖 열정을 쏟았던 NeXT는 기술적으로는 매우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 시장에서 참패합니다.
1986년에는 <픽사>를 인수했는데, 그런데 이 결정으로 잡스에게 성공의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픽사가 <틴 토이>라는 단편 3D 애니매인션을 발표했는데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이 생겨 자비를 들어가며 3D 애니메이션 제작을 지원합니다. 잡스는 <디즈니>와 애니메이션 제작 계약을 맺었는데, 작품, 캐릭터와 제작 통제권과 수입의 87.5%를 디즈니가 갖고 가겠다는 불공평한 조건을 내세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욕심을 버리고 계약을 맺었고,
1995년 개봉한 <토이 스토리>로 큰 성공을 거둡니다.
그는 토이스토리 개봉 이전부터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어, 주변에서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개봉 일주일 후 <픽사>의
나스닥 상장을 계획합니다. 그 계획은 맞아 떨어져 당시 잡스가 보유하고 있던 픽사의 지분 80%의 가치는 순식간에 1조 원이 넘게 됩니다. 토이 스토리의 성공과 픽사 덕분에 잡스는 실패한 CEO의 대명사에서 차세대 테크 산업의 리더로 다시 복귀하는 데 성공합니다.
2006년 <월트 디즈니 컴퍼니>는 주식 맞교환 방식으로 74억 달러에 <픽사>를 인수하였고, 그 덕에 스티브 잡스는 월트 디즈니 컴퍼니 지분의 7%를 보유하게 되면서 월트 디즈니 컴퍼니의 이사로서 이사회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고 합니다. 2012년 픽사는 본사 빌딩을 새로 단장하면서 건물 이름을 "스티브 잡스 빌딩"으로 명명합니다.
잡스가 Apple에 돌아왔을 당시였던 1997년에는 Apple은 무려 10억 달러가 넘는 적자를 기록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픽사의 두 번째 작품 <벅스 라이프>까지 대박을 터뜨리면서 잡스는 완전히 정상에 올라섭니다.
그리고 2000년Apple의 CEO로 완전히 복귀합니다. 젊은 잡스가 위험하다고 생각하여 이사회에서 그에게 CEO 자리를 맡기지 않았던 것인데, 잡스는 이때서야 처음으로 Apple의 진짜 CEO가 되었다고 합니다.
iPod은 무려 1억대나 넘는 물량을 팔아치웁니다. iTunes Store는 지금도 Apple의 스마트 장치들에 넣을 수 있는 MP3 음원을 판매하고 있으며, 1억 5,000만 곡 이상의 노래를 매년 팔아 치우고 있다고 합니다.
2007년 6월 29일, Apple은 iPhone을 출시합니다.
iPhone이 우리가 가장 많이 쓰는 휴대폰, mp3플레이어, 인터넷을 하나로 합친 편리하고 혁신적인 스마트제품이라는 것
첫 번째는 Multi-touch 유저 인터페이스였다. 실제로 잡스도 밝혔듯이
컴퓨터의 GUI를 휴대폰으로 가져오되 입력 장치를 마우스 대신 터치 패널과 손가락으로 바꾼 것.
두 번째는 앱 중심의 직관적인 유저 인터페이스이다. 바탕 화면에 계산기면 계산기 앱을, 시계면 시계 앱을 하나 하나 표시하는 방식으로 굉장히 직관적인 인터페이스를 구축했다. 이는 1983년부터 Mac에서 쓰던 방식을 응용해 도입한 것이다.
세 번째는 OS X을 iPhone에 도입한 것이다. 물론 모든 기능과 성능을 가져온 것은 아니고 휴대폰이라는 보다 제한된 사양에서 충분히 돌릴 수 있을 정도로 개량합니다
iPhone은 이후 스마트폰이라는 개념 자체를 새로 정립했고, iPhone의 방식을 표방한 안드로이드의 등장으로 그 개념은 더욱 확산되었다. 지금도 대부분 스마트폰의 전반적인 콘셉트는 iPhone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런 전성가도를 달리던 도중 잡스는 2004년 8월에췌장암시한부 선고라는 청천벽력을 맞게 됩니다.
온갖 역경을 넘어 다시 우뚝 섰다 싶었던 잡스에게는 그야말로 날벼락이었을 것입니다. 특히 췌장암은 암 중에서도 가장 나쁜 암으로 발생 자체가 희귀할 뿐만 아니라 증상 없는 상태가 길어 발견 시기도 보통 늦기 마련이어서 치료가 매우 까다로운 암이기 때문입니다.
잡스는 2003년 10월 이미 췌장암 판정을 받았으나, 이듬해 3월까지 수술을 거부하고 정신수행, 식이요법과 침술 등과 같은 대체요법으로 암을 고치려고 했다고 합니다. 잡스는 몸에 칼을 대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보였으며, 부인이 설득하고 난 뒤에야 겨우 수술을 받아들입니다. 수술을 받아들인 뒤에도 자신의 병에 대해 치밀하게 공부한 뒤 치료법까지 지시하는 등 전문가처럼 행동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처음 발견 당시에 췌장의 5%만 퍼져 있었던 암은 9개월 뒤에는 췌장 전체로 퍼졌고 수술을 한 뒤에도 전이가 계속되어 결국 목숨을 잃게 됩니다. 사후에 그가 대체의학에 의존하다가 치료 시기를 놓쳐서 죽었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2011년 8월 25일, 결국 CEO직에서 사임한다고 밝히고 불과 두 달 뒤인 2011년 10월 5일, 5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합니다.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오 와우, 오 와우, 오 와우."
이 날 사람들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기업인이 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만족할때까지 팀원들에게 무섭게 통제한 CEO로 보는가 하면 더 새로운 제품을 창조해내려는 열망가득 찬 개발자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이기적이고 지나치게 완벽주의를 추구해서 주위 사람을 힘들게 했다는 관점도 있다. 괴팍했고,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독단적인 면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열정과 열망으로 마침내 혁신을 이루어낸 것이다.
1.우주를 놀라게 하자 2. 해군이 아니라 해적이 되라
그가 떠난 현재, 그의 입에서 나온 말 한마디가 널리 회자되고 있다고 합니다
"항상 갈망하라, 늘 바보처럼" "도그마,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얽매이지 마라" "언제나 우직하게, 하루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살아가라" "진정으로 일에 만족하는 길은 위대한 일을 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아직 그런 일을 찾지 못했다면 계속 찾아라, 포기하지 마라, 사랑하는 일을 찾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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